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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1. 2006.10.08 ‘충주 영어신동’이 지구촌 평화기구 수장으로

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사실상 확정
고3때 케네디 대통령 만난후 외교관 꿈
집안살림 도우려 美대신 인도근무 자원
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 경험이 큰도움

반기문(潘基文) 외교부장관의 어릴 적 주특기는 공부였다. 1944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충주로 옮겨간 반 장관은 학창 시절 내내 1등과 반장을 놓치지 않았다. 창고업을 하던 아버지(반명환·潘明煥)가 50년대 말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‘모범생’으로 성장했다.

“4남2녀 중 장남인 오빠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로 이름을 날렸다. 동생들에게는 학창 시절 내내 ‘반기문 동생’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.”(막내 동생 반경희씨·약사)


◆충주의 영어 신동

그중에서도 반 장관의 ‘오늘’을 열어준 것은 영어실력이다. 충주중 시절, 영어교사가 무조건 하루에 배운 것을 10번씩 써 오라고 했다.


반 장관은 매일 같이 그 숙제를 다 하면서 문장을 통째로 외워버렸다. 고 1 때는 같은 반 학생을 위한 영어 교재를 만들었다. 반 장관이 상당한 수준의 영어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충주비료 공장 때문이었다.


그 공장엔 미국인 엔지니어와 가족 20여 명이 살고 있었다. “미국인 엔지니어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회화를 가르쳤는데, 충주고의 반기문 학생이 제일 뛰어났다. 그 사람은 영어로 된 것이면 뭐든지 달달달 외우고 다녔다. 거의 미친 사람처럼….”(고향선배 안영수 경희대 교수·여)

충주에서 소문난 영어실력으로 고 2 때 적십자사에서 주관한 ‘외국학생의 미국방문 프로그램(VISTA)’에 선발됐다. 한국에선 4명을 뽑았는데, 소도시인 충주 출신으로 반 장관이 뽑히자, “충주시가 난리가 났다”(남동생 반기상씨·사업)고 한다.


반 장관이 이듬해 고 3 여름에 한 달 동안 미국을 방문할 때, 충주여고 학생들이 가사 시간에 미국인들에게 선물할 복주머니들을 만들어 전달했다. 이를 대표로 전달한 여학생이 충주여고 류순택(柳淳澤) 학생회장. 류씨는 반 장관이 외무고시에 합격한 다음해인 71년 서울 흑석동의 1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반 장관과 신혼살림을 시작했다.

반 장관은 미국방문 당시 워싱턴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외국 학생들과 만났다. 틈틈이 꺼내본 케네디 사진은 반 장관을 외교관, 장관, 유엔 사무총장으로 이끌었다.


◆미국 아닌 인도 총영사관 자원

가세(家勢)가 기울어 고학을 하면서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반 장관은 70년 외무고시 3회 합격으로 외교관이 됐다.


최성홍 전 외교부장관에 이어 2등이었다. 반 장관은 가족들에게 “평생 1등만 해 오다가 2등을 처음 해봤다”고 말했다.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칠 때는 다시 1등을 해, 주미대사관에 발령받도록 돼 있었다. 그러나 당시 반 사무관은 후진국인 인도(뉴델리)총영사관 근무를 희망했다.


반 장관의 동생 기상씨는 “미국에 가면 저축하기 힘든데 후진국에 가서 돈을 아끼면 집안에 보탤 수 있을 것 같아 형님이 인도를 자원했다”고 말했다.

그의 인도총영사관 근무 자원은 반 장관의 외교관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노신영 주뉴델리총영사(전 국무총리)를 만나는 계기가 됐다.


인도와의 수교를 위해 파견된 노 총영사는 햇병아리 외교관의 영어실력, 민첩함, 판단력, 성실함에 주목했다. 73년 한·인도 국교 수립으로 주뉴델리총영사에서 주인도대사가 된 노 전 총리는 공관장 회의에서 반 사무관을 공개적으로 칭찬했다. 그는 회고록에서 인도 근무를 회상하며, “(앞으로) 나를 도와 많은 일을 하게 된 초면의 반기문 사무관은 신혼 초였다”고 썼다.

노 전 총리는 안기부장을 거쳐 국무총리가 되자 1급이 맡던 의전비서관에 3급인 반 장관을 임명했다. 이어 87년 이사관(2급)으로 초고속 승진시켰다. 그러자 반 장관은 당시 자신의 동기, 선배, 후배 100여 명에게 1주일에 걸쳐서 일일이 편지를 썼다. “일찍 승진해서 죄송하다”는 내용이었다.



◆ABM사건

반 장관은 김영삼 정부에서 외교부 차관보?청와대 의전수석?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승승장구했다. 그러나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관운이 좋지 못했다. 주오스트리아대사에서 2000년에야 차관이 됐다. 반 장관과 비슷한 시기에 장관에 임명된 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은 당시 기자에게 “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, 반기문이를 차관으로 데리고 장관을 하다니…. 앞으로 장관은 그냥 하는 거야”라고 말했다.


2001년 반 장관의 외교관 인생 31년 만에 고비가 왔다. 그해 2월 한·러 정상회담 합의문에 실무진의 실수로, 부시 행정부가 폐기를 주장하고 있던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(ABM) 조약의 ‘보존과 강화’를 골자로 하는 문장이 포함돼 버렸다.


한·미 간에 큰 파문이 일었다.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3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·미 정상회담을 마친 후, “내가 이 문제로 미국측에 얼마나 많이 사과를 해야 했는지 모른다”고 말했다. 이정빈 장관과 반 차관이 차례로 경질됐다. 문책인사였다. 불명예 퇴진한 반 차관은 “죽고 싶다. 내가 단 1시간도 나를 위해 쓴 적이 없는데…” 라며 연락을 끊었다. 경희대 안영수 교수는 ‘실업자’ 반기문에게 이젠 “차를 운전해 줄 사람이 없으니 지하철 타고 다니라”며 정기권을 사줬다.


◆전화위복

이런 그를 4개월 만에 한승수 당시 외교부장관이 발탁했다. 한 장관은 자신이 유엔총회 의장이 되자, 그를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 겸 주 유엔대표부대사로 뉴욕에 부임시켰다. 외교부 차관을 한 사람이 겨우 유엔에 가서 국장급이 할 일을 하느냐는 비아냥도 있었지만, 이 자리는 결국 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.


(이하원기자 [ may2.chosun.com])

[조선일보 2006-10-04 02:50]   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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